가족과 사별 후 내 슬픔이 가장 큰 줄 알았는데
가족과 사별 후 내 슬픔이 가장 큰 줄 알았는데
5일 방문한 동백성루카병원은 한산했다.
복작복작하지만 특유의 어두운 공기가 깔려 있는 여타 병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따금 의료진과 보호자들이 의료용 침대를 천천히 옮길 뿐이었다.
복도 벽면에는 액자가 가득했다.
사진 밑에는 연도와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2021년, 아들과 함께 브이를’과 같은 식이었다.
동백성루카병원은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 기관이다.
살리는 일보다는 말기 환자와 보호자들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치료가 중점으로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은 대부분 사별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대다수는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백성루카병원에서 사별가족들을 만나 물었다.
갑자기 췌장암으로 떠난 남편
사별가족실에서 만난 이진희(가명, 49세) 씨는 병원을 마주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과 사별했다. 췌장암이었다. 특별히 증상이 있던 것도 아닌데 건강검진에서 4기 소견을 받았다.
진료를 보러 간 대학병원에서 집에는 못 간다고,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라고 권유했다.
손 쓸 틈이 없었다. 이후 대학병원 입원실에서 잠깐,
첫 번째 호스피스 병동에서 한 열흘, 동백성루카병원에서 16일 정도 있다가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기 전, 이틀 동안 집에 있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엔 그나마 위안이 됐던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애들이랑 같이 와서 아빠와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본인 스스로 집 문을 나서면 못 돌아오는 걸 알았을 테니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싶기고 하고….”
진희 씨는 사별 후에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신랑은 성실한 사람이었고 한마디만 하면 알아서 해주는 사람이었거든요. 뭐든지 잘 고치고.
애들한테도 잘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더라고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던 게 가장 미안해요.”
평소 못해줬던 기억들은 죄책감으로 몰려왔다.
“출근할 때 일어나지도 않고 밥도 안 해줬는데 지금은 새벽 5시 넘으면 눈 떠지고 새벽 6시에 나가 1시간씩 걸어요.
” 그는 호스피스가 보호자들 케어에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죄책감으로 이어졌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유방암 생존율 높다더니… 마흔살 딸이 떠났다
김경숙(가명, 62) 씨는 지난 5월 딸과 사별했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딸은 직장생활을 하다 서른 살에 사범대에 편입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
어느 날 가슴에 멍울이 느껴졌고 검사 결과, 유방암을 진단받았다.
당시 경숙 씨는 유방암 완치율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딸의 유방암은 뼈로 전이된 삼중음성유방암이었다.
삼중음성유방암은 난치성 유방암이다.
표적치료제 사용이 어렵고 재발률도 높아서 예후가 좋지 않다. 암은 야속하리만큼 착실했다.
항암은 듣지 않았고 코로나까지 지나간 뒤 상태는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다.
여러 합병증이 찾아왔고 암은 뇌척수로까지 전이됐다.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할 때 쯤 그의 딸은 하루 대부분을 의식을 잃은 채 보냈다.
길어도 3개월이라는 말을 듣고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만 40세였다.
경숙 씨는 여전히 실감이 안 난다고 말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했다.
“자식을 먼저 보냈다는 슬픔은 제 일이 아니었을 땐 몰라요.
세월호 때도 그렇고 이태원 때도 그렇고 그냥 남의 일이니까 시간 지나면 잊어버리고
그랬는데 막상 이렇게 내 일이 되니까 그때 부모들이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슬픔 어찌할 줄 몰라, “하루 수백번씩 주님 원망”
원체 티내는 걸 싫어한다는 진희 씨는 남편과 사별 후 지인들에게 전과 같이 대해달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본인의 감정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싫어서였다.
그렇게 말해놨지만 슬픔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이 임종한 동백성루카병원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사별가족 모임 참가를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집에서는 혼자 가만히 있으면 그냥 눈물이 났어요.
애들이 엄마가 우는 지 안 우는지 눈치를 보고,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으니까. 여기부터 나가볼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가톨릭 신자인 경숙 씨는 사별 후 신앙심 때문에 괴로웠다고 회상했다.
“종교를 안 가졌으면 모르겠는데 왜 딸을 데려갔냐고 주님 원망도 하고,
그러다가 천국에 간 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까 정신이 온전치 못할 것 같아 두려웠어요.”
그는 5년 전, 가톨릭 신자로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던 적이 있다.
사별가족도 호스피스의 치료 대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딸과 사별 후,
가톨릭 주보를 읽다가 프로그램을 발견해 신청하게 됐다. 과거 호스피스 교육도 그렇게 신청한 것이었다고
말한 그는 그때만 해도 자신이 사별가족 모임에 참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며 멋쩍게 웃었다.